제 6화. 초기 교회 – 초기 교부들(2)
9.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주후 296-373년)

그는 북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헬라인이었다. 그는 평범하고 전형적인 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더가 아타나시우스의 성실함을 발견하고는 그를 그의 집으로 데려갔다. 따라서 그는 좋은 교육을 받는 것 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사상가들과 만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는 기독교 규율의 새로운 형태인 수도원주의에 매료되었다. 그는 성 안토니의 생애라는 이름으로 그가 처음 만난 성직자들 중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의 전기를 썼다. 그거 여전히 20대였을 때, 그의 유명한 책들 중 하나인 신성한 말씀의 육체되심에 관하여를 썼다. 이 책의 주된 입장은 로고스(말씀)는 참 하나님이 틀림없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길에 관하여 그는 명확하게 말하였다.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주후 319년에 그는 부제로 임명되었고 알렌산드리아 주교의 서기가 되어 주후 325년 니케아공의회에 그와 동행하였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는 당시 30살도 채 되지 않았지만, 아리우슺주의에 대항하여 니케아 신조를 공식화하는 것을 도왔으며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믿음을 수호하는데 여생을 받쳤다. 주후 328년에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선출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그 직무를 맡았다. 그는 다섯 번 추방되었는데 첫 번째로 추방된 것은 주후 336년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 8년 후인 주후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주후 325년의 결정을 확인하였으며 그것은 아리우스주의를 주장한 모든 자들에게 추방의 위협을 가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아리우스주의는 제국내에서 끝나게 되었고, 아리우스의 이단론에 대항하여 진리를 위해 굳게 서 있던 아타나시우스가 승리하게 되었다. 그는 약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0. 카파도키아 교부들(The Cappadocian Fathers)

주후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에서 호모우시온신조가 정설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소아시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이 신조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다. 카파도키아 세 명의 교부들은 니케아의 정설을 주장하는 동시에 이러한 어려움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삼일성의 한 본질과 세 위격들 사이를 구별했다. 그들은 삼일성을 “세 위격들 안에 있는 하나의 본질”이라고 설명하였고, 삼일성의 이 명확한 어구를 대중화 하였다.
11. 밀란의 암브로스(Ambrose of Milan, 주후 339-397년)

그는 갈리아(프랑스)의 수도인 트레브(트리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 갈리아, 스페인 지방의 주지사였는데 암브로스가 13세였을 때, 아버지가 사망했다. 그는 로마에서 계속 교육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법을 공부하여 법률가가 되었다. 그는 밀란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지방의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주후 374년에 아리우스파인 밀란의 주교가 사망했는데, 계승자 선택을 두고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두 반대되는 당파들, 즉 아리우스의 이단론 지지자들과 나케아의 정통신앙 지지자들은 새로운 주교의 선택에 합의를 할 수 없었다. 그는 부유 했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부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에게 바쳤다. 그는 자주 설교했고, 때로는 매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구워 받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가 회심한 후에 그에게 침례를 주었다. 암브로스는 “황제는 교회 안에 있지 않고 교회 위에 있지 않다.”라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그는 교회는 국가로부터 독립하여 서 있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는 약 5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2. 제롬(Jerome, 주후 345-420년경)

그는 이탈리아 북동쪽 지역인 스트리돈에서 그리스도인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젊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나중에 그는 법률가가 되었고, 그리스도께로 돌이켜 주후 366년에 침례를 받았다. 그는 아퀼레이아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사는 한 무리의 친구들과 함께 하였다. 이 무리는 제롬 때문에 어느 정도 해체되게 되었고, 제롬은 자신의 모든 장서들을 가지고 친구들과 함께 안디옥으로 여행을 하였다. 거기서 그는 열병이 났고,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에서 그리스도께서 제롬에게 그가 합당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세속적인 책들을 결코 다시는 읽지 않겠다고 약속하였고 은둔자의 삶을 살기 위해 사막으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헬라어에 대한 그의 지식을 발전시켰고, 한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으로부터 히브리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지역의 다른 은둔자들은 그를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안디옥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주후 378년경에 사제로 임명되었다. 주후 379년에 나지아주스의 그레고리 문하에서 공부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주후 382년에 그는 로마 주교 다마수스의 서시가 도기 위해 로마로 돌아갔다. 제롬에게 기존의 라틴어 신약성경을 원어에서 라틴어로 개정하는 기념비적인 과업을 제안한 사람이 바로 다마수스 주교였다. 기존 라틴어 신약성경들은 불완전했기 때문에 개정이 필요했다. 주후 384년에 사복음서가 먼저 나왔고 그 후에 신약성경의 나머지 부분들이 완성되었다. 같은 해에 다마수스 주교가 사망했을 때 제롬은 그의 구약 성경 번역 작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부유한 파울라를 포함한 한 무리의 독실한 여성들과 동행하였다. 그는 가르치는 일과 번역작업을 위해 수도원을 세웠고 여성들을 위하여 수녀원을 세웠다. 또한 교회 건물을 지었으며,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도 세웠다. 주후 405년 약 22년간에 걸친 라틴어 성경 번역 작업이 끝이 났다. 그의 구약성경의 번역은 히브리어 원어를 라틴어로 바꾼 것이었다. 제롬의 성경 번역은 불가타역(라틴어로 ‘대중판’이란 뜻) 이라고 불린다. 이 불가타역은 가장 위대한 그의 업적이었고 중세 시대에 걸쳐 서방 세계의 표준 성경이었으며, 위클리프 성경을 포함한 첫 영어 번역본들의 기초가 되었다. 제롬은 또한 구약과 신약성경, 교회사와 교리에 관한 책들에 대하여 많은 해설서를 썼다. 그는 또한 펠라기우스 이단론을 열성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는 주후 418년경에 돌아와서 주후 420년 약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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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주후 347-407년)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요한이 어렸을 때, 사망했고 그는 경건하고 헌신적인 그리스도인 어머니에 의해 길러졌다. 그가 교육을 마치고 안디옥에서 법률가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주후 370년에 주님을 믿고 침례를 받았다. 그 후에 그는 법률가로서 세상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도록 간청하였기 때문에 그는 집에서 수도자의 생활을 했는데, 건강을 겨우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만 먹고, 마룻바닥에서 잤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와 명상으로 보냈다. 그의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 그는 성직자로 살기 위하여 안디옥 남부로 갔다. 그는 엄격하게 금욕주의적이었는데 주후 380년 건강 문제로 안디옥으로 돌아가야 했다. 주후 381년에 그는 부제로 임명되었으며 주후 386년에는 사제로 임명되었다.
주후 398년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었는데, 여제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로 인하여 추방을 당했다. 두 번째 추방 때 마지막 추방지로 가는 도중에 자신을 부당하게 대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사후에 황금의 입이라는 의미를 가진 ‘크리소스톰’이라고 불렸는데 실제로 그는 초기 교회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들 중 한명이었다. 성경 읽기에 관하여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항상 성경을 읽고 있으며, 항상 당신에게 이것을 권고합니다. 당신은 집에서 매일 성경말씀을 읽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하십시오.” 그의 설교들은 대부분 성경에 대한 해석과 실행 가능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의 저서들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행함을 강조하고,수도원 제도를 높였으며 순결함과 정절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일은 마치 끊임없이 흐르는 진흙탕 물에 모래 한줌을 씻으려고 시도하는 사람과 같다.” 그는 약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4.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주후 354년 11월 11일-430년 8월 28일)

그는 현재 북 아프리카 알제리의 일부인 타가스테에서 354년 11월 13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파트리시우스는 주후 371년 인생의 말년이 되어서야 회심하고 침례를 받았다. 그의 그리스도인 어머니 모니카는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니카의 끊임없는 기도와 지속적인 증언들은 결국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을 이루어 냈다. 그는 교육을 더 받기 위하여 카라타고로 갔는데, 그의 책 참회록에 따르면 거기서 그는 틈만 나면 죄를 지었다. 여종과 관계를 맺어 주후 373년에 사생아 아데오타투스를 낳았고 그때와 거의 동시에 마니교라고 알려진 이단 종파에 거의 9-10년을 몸 담았다. 주후 383년에 그와 그의 여자친구 그리고 그들의 아들은 어머니 모니카를 따라 로마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사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암브로스의 영향력 있는 설교를 들으러 갔으며 암브로스의 이러한 메시지들은 그에게 인상을 주기 시작하였다.
그의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인 참회록은 주후 400년경에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형식을 취했으며 그의 어머니의 사망 때까지의 그의 전기를 포함한다. 그 안에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고백하기 위하여 자신의 영적인 삶을 검토하였고 죄들을 고백하였다. “주님 사람은 당신의 창조물들 중의 하나이며 사람의 본능은 당신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당신에 대한 생각은 사람의 마음을 매우 깊게 일깨워 당신을 찬양하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를 당신 자신을 위해서 만드셨고,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는 평안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출처 — 성경진리사역원(BTMK) (2017.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