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휘트필드

그는 영국, 글로스터에 있는 벨 여인숙에서 태어났다.

제 27화. 감리교 – 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

그는 영국, 글로스터에 있는 벨 여인숙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토마스와 엘리자베스 휘트필드는 벨 여인숙의 주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2세 때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는 다른 이들을 웃기게 하려고 설교자를 조롱하거나 기도를 읽거나 설교문을 작성하곤 하였다. 그는 연극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15세가 되던 해에 그는 여인숙에서 일하기 위해 학교를 떠났지만 곧 학교로 되돌아 왔다.

18세가 되던 해 그는 급비생으로 옥스퍼드 대학의 펨브로크 단과에 입학한다. 후에 옥스퍼드에서 그는 찰스 웨슬리에 의해 존 웨슬리가 이끌고 있는 ‘신성클럽’을 소개 받는다. 그는 윌리엄로우의 ‘경건한 삶을 위한 부르심’에 영향을 받게 된다. 웨슬리는 그에게 헨리 스코갈의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소개해 준다. 이 책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휘트필드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향락을 절제함’과 같은 종교적인 의무에 필사적으로 분투한 끝에 1735년 3월, 20세의 나이에 거듭남을 체험하게 된다. 그는 당시 ‘하나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더시고 살아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얻기를 기뻐하신다’라고 기록했다.

1736년 그는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글로스터의 주교에 의해 성공회의 성직자로 임명 받는다. 그는 글로스터에서 첫 설교를 하게 된다. 1738년 조지는 조지아에서 전도하고 있는 웨슬리를 돕기 위하여 미국으로 향했으나 그가 조지아에 도착했을 때 웨슬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식민지에서 그에 대한 평판은 좋았으며, 그는 ‘사바나에’ 고아원의 필요를 보게 되었다. 그는 곧 영국으로 돌아와 그곳을 위한 성금을 모금하기 시작했다.

1739년, 영국으로 돌아온 후 성직자들은 그에게 더욱더 폐쇄적이었다. 조지는 옥외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첫 야외 설교는 브리스톨 근처 킹스우드의 광부들을 대상으로 했다. 비록 이러한 설교방식은 성공회의 전통을 깨뜨렸지만, 낮은 계층의 이들에게 복음을 가져오는데 있어서 효과적이었다. 대부분의 낮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건물 내에서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후 수 천명의 사람들이 휘트필드의 설교를 듣기 위해 왔다. 많은 교회 건물들은 그들 모두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크지 않았다.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조지는 그가 없는 동안 그의 사역을 맡기기 위해 웨슬리형제들을 초청했다. 그는 존과 찰스 웨슬리에게 그들이 하던 옥외전파를 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휘트필드가 칼빈주의자였기 때문에 그와 존 웨슬리 사이에 교리상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 분명해 졌다. 그는 존 웨슬리에게 그들의 차이점들을 둘만 아는 사실로 지켜 줄 것을 부탁했다.

1739년 말에 휘트필드는 다시 미국에 도착했다. 그의 생애동안 그는 미국에 일곱 번 방문하였고 마지막 방문 때에 그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다. 뉴잉글랜드에서는 많은 군중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였다. 미국의 뛰어난 신학자인 조지 휘트필드와 조나단 에드워드가 설교하고 사역 했던 1740년부터 1741년 사이는 미국 대각성운동(American Great Awakening)의 절정기였다. 수 천명이 구원 받았으며 부흥이 일어났다.

그가 영국으로 돌아온 1741년에는 그와 웨슬리 형제 사이에 공개적인 단절이 있었다. 이것은 조지가 없는 동안 존 웨슬리가 공공연하게 그의 칼뱅주의 관점을 반대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해 휘트필드는 처음으로 ‘칼뱅주의’가 그 지역의 신학이었던 스코틀랜드를 방문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곳에서 환영을 받는다. 그는 스코틀랜드를 총 14번을 방문했고 그곳에서의 부흥을 일으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휘트필드는 웨일즈에서 부흥을 가져온 복음을 전파한 ‘하웰 해리스’와 ‘다니엘 롤랜드’와 함께 동역했다. 1743년 그들은 휘트필드를 인도자로 한 현재의 장로교파인 ‘칼뱅주의 감리교 협회’를 형성한다.

그러나 그는 이후 미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헌신하기 위해서 사임한다. 이것은 어떠한 복음의 일이라도 자유롭게 돕고, 웨슬리로 부터의 끊임없는 반대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휘트필드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그리스도만 영광 받고 오직 나로 모든 사람의 노예가 되게 하십시오!”라고 선포했다. 런던에서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위해 커다란 나무로 된 헛간을 지었는데, 그는 이곳을 무어필드(Moorfields)에 있는 지성소라 불렀다. 이곳은 1756년 런던 토튼햄 카운트로에 벽돌 건물로 대체 되었다.

조지 휘트필드의 설교는 존 웨슬리보다 더욱 유창해지고 강력해졌다. 그는 의심 할 바 없는 설교계의 왕자였다. 저명한 영국의 배우 데이비드 개릭이 조지 휘트필드의 설교를 듣고 “만약 내가 휘트필드와 똑같이 ‘오(Oh)’라고만이라도 말할 수 있다면 나는 100파운드를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단순히 ‘메소포타미아’라는 단어의 발음에 변화를 주어서 그의 청중들을 울거나 떨게 만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반복되는 설교가 그의 설교를 약화시키거나 낡게 하지 못했다. 반대로 그가 40번째 설교의 만족에 이르기 전까지는 결코 그의 가장 높은 능력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는 좀처럼 듣기 힘든 하나님이 주신 좋은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다양했으며, 최고의 온유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것은 천둥소리마저 집어 삼킬 수 있었고, 듣고 있는 모든 귀를 설레게 했으며, 모든 심장들은 떨리게 했다. 동작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능가하거나 비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얼굴 표정과 동반된 손가락의 움직임 하나가 관중들을 감격하게 하거나 눈물이 나도록 하였다. 그의 얼굴은 하늘로부터 온 빛으로 빛났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은 그가 어디서 복음을 전하든지 또는 하나님을 말씀을 사역하든지 그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 것에 관해 오랫동안 기도한 것이다. 그는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였다. 이렇게 한 시간 동안 주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의 습관이었다. 그리고 오전 5시에 설교를 하고 매일 밤 10시에 마치는 시간을 엄수했다. 그는 “내가 비록 약할지라도 종종 매일 하루가 끝난 후 두 시간동안 헬라어 신약을 기도로 가져갔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존 웨슬리와는 다르게 회심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그룹을 모으지 못했고, 그들을 위한 목양도 제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노력의 열매들을 보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후에 웨스리의 방식이 더 낫다고 인정했다.

웨슬리 형제들과 같이 그 또한 성공회와 다른 이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그는 자리에 눕게 될 정도로 잔인하게 공격을 받았고 거의 죽을 뻔하였다. 그는 노략 당했고 계란세례와 돌을 맞았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는 이러한 박해를 예수님의 유익을 위한 기쁨으로 여겼다.

1740년 휘트필드가 25살 때 처음으로 그는 미국인 개종자인 엘리자베스 델러모트라는 젊고 매력적인 여성에게 청혼했다. 그녀는 그보다 11살의 연상이었고 미망인이었다. 그녀는 매력적이지 않았고 그녀 자신도 휘트필드에게 감정적으로 끌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신실한 감리교 신자였다. 그들은 1741년 결혼하였고 2년 후에 한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그 아이는 4개월 만에 죽고 만다.

그의 마지막 설교는 1770년 9월 29일 토요일날 미국 메사추세츠주 엑스터의 야외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주 예수님, 저는 당신의 일을 수행하기에 몹시 지친 몸이지만, 당신의 일을 향해서라면 결코 지치지 않습니다. 저의 경주가 아직 마치지 않았다면, 현장에 가서 다시 한 번 당신을 위해 말하게 하시고, 당신의 진리를 확증하게 하시고 집으로 돌아와 죽게 하소서.”

그의 설교는 2시간동안 지속되었다. 그날 이후 그는 그의 오랜 친구 조나단 파슨스와 함께 뉴버리 포트로 돌아왔다. 이날은 토요일이었는데 조지 휘트필드는 주일날 설교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부터 군중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 들었다. 그는 지금 한마디도 할 수 없음을 알리고 초 하나를 들고 침실로 향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린 많은 이들을 보고는 그는 계단에서 멈춰서서, 그들의 마음을 녹이는 설교를 전했고 그들을 눈물을 흘렸다. 그는 촛불이 다 불타서 소진 될 때까지 말했다. 그날 밤 그의 천식이 다시 그를 덮쳤다. 1770년 9월 30일 주일 오전 6시에 조지 휘트필드는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출처 — 성경진리사역원(BTMK) (2017.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