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뮐러

독일인인 조지 뮐러는 프로이센의 크로펜슈테트(Kroppenstedt)에서 태어났다.

제 45화. 형제회(The Brethren) - 조지 뮐러(George Muller)

독일인인 조지 뮐러는 프로이센의 크로펜슈테트(Kroppenstedt)에서 태어났다. 그는 침례를 받고 참된 회개 없이 곧바로 루터파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 그의 우매함과 죄는 그의 동년배들을 능가했다. 십대 때 사기죄로 3주간 교도소에 있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뮐러가 루터 교회의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는데, 이것은 당시 성직자는 넉넉한 생활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825년 그는 신학생으로 할레 대학교(Halle Unoversity)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의 나쁜 품행은 그해 11월 어느 한 가정에서 열린 기도 집회에 참석하기 전까지는 바뀌지 않았다. 뮐러가 말하기를 “나는 사랑스런 형제의 친근한 대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는 ‘자네가 좋은 대로 자주 찾아오게, 우리의 집과 우리의 마음은 자네에게 열려 있다네’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찬송을 부름으로 집회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한 형제가 성경 말씀의 한 부분을 가지고 강한 기도를 한 후 복사한 메시지를 읽었다. 집회가 끝날 때쯤 한 번 더 찬송을 불렀고, 그 집의 주인이 기도를 하였다. 뮐러는 “그날 저녁은 내도록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왜 그런지 물었어도 대답할 수 없었지만 나는 행복했다. 이전의 기쁨들은 그날 저녁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리하여 뮐러는 가정 집회를 통해서 구원받았고, 그 후 그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1829년 그는 유대인 선교 훈련을 위해서 런던으로 갔다. 런던에서 그는 데본의 틴머스에 있는 에벤에셀 예배당(Ebenezer Chapel)에서 섬기도록 인도 받았다. 1830년 그는 A.N. 그로브스의 자매인 매리 그로브스와 결혼하게 되었다. 얼마 후 그는 봉급을 받지 않고 믿음으로 살 것을 결심하였다. 1832년 그는 헨리 크레이크와 베데스다 예배당에서 섬기기 위해 브리스톨로 이주하였는데, 이곳은 브리스톨의 형제회 모임이 시작된 곳이었다. 그와 크레이크는 후에 공개파 형제회의 인도자가 되었다. 뮐러는 그의 생애에 오직 기도와 믿음만을 의지하여 브리스톨에 5개의 큰 고아원을 지었다. 이곳에서 그는 10,000여명의 고아를 보호하였고, 150만 파운드를 받았으며, 수백만 권의 책과 성경을 배포하였다. 그는 또한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 사역을 재정적으로 지원해주었다. 또한 그는 그의 사비로 받은 81,000 파운드를 기부하였다. 세상을 떠날 때 그가 남긴 것은 오직 60파운드와 집의 가구들이었다. 그는 생애동안 150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

그는 1875년과 1892년 사이에 복음을 전하고 믿는 이들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영국, 유럽,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 중국 등으로 여행했다. 그는 25만 마일을 이동했고 300만 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뮐러는 성경을 사랑했는데 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 그는 100번 이상 성경을 읽었고 읽을 때마다 어떤 새로운 것을 찾고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주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주님을 ‘사랑스런 구원자’라고 언급했고 자신에 대해서는 ‘지옥에나 합당한 죄인’이라고 말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에도 그는 여전히 기도 집회에 참석하여 함께하였다. 그는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위트니스 리에 의하면 워치만 니는 뮐러의 전기를 믿음에 관해 빛이 가득한 책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뮐러의 어록

‧ 믿음이란 하나님이 무언가를 말씀하실 때 나도 동일하게 말하는 것이다.

‧ 매일 내가 하나님께 특정한 시간을 깨워달라고 구하면, 항상 정확히 그 시간에 일어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출처 — 성경진리사역원(BTMK) (2017.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