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화. 중세교회 – 종교개혁의 출현

1. 서문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14세기와 15세기는 종교개혁의 여명으로 여겨진다. 이 장에서는 종교개혁에 있어서 4명의 주목할 만한 선구자들을 연구할 것이다. 그들은 존 위클리프, 프라하의 제롬, 얀 후스, 그리고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이다.
2.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년)

그는 북부 요크셔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위클리프의 영지의 주인이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했고, 1372년에 신학 박사 학위를 얻었다. 1361년에 성직에 임명되고 1374년에 왕을 섬기는 공직에 입문했다. 그의 성경과 교황제도에 관한 관점에 대해 어떤 사람은 급진적이라 생각했고,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단적이라고 여겼다. 1377년 그는 로마교황의 교서에서 정죄 받았고 같은 해 초에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 아래 랜캐스터의 공작이었던 존 오브곤트를 사용하시어 그를 보호하셨다. 1378년 램버스에서 재판이 시도되었으나 노왕의 과부가 개인하였다. 1381년 농민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와 관련한 아무런 책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난을 받게 되었다. 1382년 런던에서 있었던 신학자들의 회의에서는 위클리프의 저작물에 이단성과 오류가 들어 있다고 포고하였다.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지진이 일어나 빌딩을 뒤흔들었는데 위클리프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모두가 이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동의하심을 뜻한다고 주장하였다. 1381년 농민반란이 일어난 직후 위클리프는 옥스퍼드를 떠나 러터워스로 물러가서 저술활동을 계속 하였다. 1384년 두 번째로 발작을 일으킨 후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경과 관련하여 성서에는 오류가 없으며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전통, 교황 혹은 다른 어떤 근원에 의해 보완되어야 할 더 이상의 가르침이 없다고 말했다. 성경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있고, 성경만이 유일한 진리이다. 따라서 그는 성경을 따르는 자만이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모든 가르침들과 전통들, 공의회들, 심지어 교황들 까지 성경에 의해 점검 받아야 했다. 또한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열려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위해 위클리프와 그의 추종자들은 전 성경을 영국에서 처음으로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했다. 그리하여 읽을 수 있거나, 읽을 때 들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배울수 있게 하였다. 위클리프의 시대에는 아직 인쇄기가 없었다. 따라서 하나의 복사본을 만들기 위해서는 10달이 걸렸고 400파운드(9600페니)의 비용이 들었다. 2페니는 당시 닭 한 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한 달 동안 돈을 모아 성경의 한 페이지를 사는데 쓰기고 하였다.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은 ‘롤라즈’라 불렀는데, 이것은 ‘중얼 중얼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그들의 반대자들에 의해 지어진 독설적인 용어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평신도 설교단을 조직하였다. 성직자들은 그들을 조소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설교를 통하여 믿는 이들이 되었다. 롤라즈들은 박해를 받았으나 영어 성경을 보급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 불만의 씨앗을 뿌림으로 16세기 영국의 종교개혁을 위한 길을 마련했다. 위클리프가 영국에서 시작한 일은 결코 멈추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저서에서 우리는 종교개혁의 모든 씨앗들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마땅히 종교 개혁의 샛별로 여겨졌다.
3. 프라하의 제롬(Jerome of Prague, 1370-1416년)

그는 존 위클리프의 말을 듣고, 그에게 영향을 받은 영국의 유학생이었다. 그는 프라하로 돌아가 구원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은 복음서의 가르침들로 되돌아 가야 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고 가르쳤다. 그는 얀 후스에 대한 부당한 처우로 인하여 마음이 괴로웠다. 따라서 이에 대한 견해를 저술하였고, 그로 인해 체포되었다. 처음에 그는 이러한 견해를 포기하고자 했으나, 결국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조력으로 이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공의회는 그를 이단이라고 정죄하며 파문하였고 집행을 위해 세속적인 권위자들에게 넘겼다.
몸에 불이 붙기 전에 그가 군종에게 말하길 “내가 방금 노래한 것을 나는 믿는다. 이 신조는 내 생애 전체의 믿음이다. 내가 오늘 죽는 것은 얀 후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진정한 전파자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순교할 당시 그는 대략 46세의 나이였다.
4. 얀 후스(John Huss, 1372-1415년 7월 6일)

그는 오늘날 체코 공화국의 일부인 보헤미아에서 가난한 부모 아래 태어났다. 보헤미아어로 후스는 ‘거위’라는 뜻으로 때때로 반대자들이 그를 조롱하기 위해 사용했다. 후에 그가 체포되었을 때, 집행인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이제 한 마리의 거위를 태울 것이지만, 일 세기 내에 당신은 굽지도, 끊이지도 못할 백조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사망했으나, 어느 부유한 귀족이 그의 모든 교육비용을 지불하였다. 그는 프라하 대학으로 가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402년에 대학 학장과 프라하에 있는 베들레헴 예배당의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1382년 영국왕 리처드 2세는 보헤미아의 앤과 결혼을 하였고, 이것은 위클리프의 저서들이 보헤미아로 들어가도록 도왔다. 얀 후스는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읽었다.비록 그가 화체설과 관련해서는 위클리프와 동의하지 않았지만 다른 가르침의 방면들을 받아들였다. 그는 프라하의 제롬과 친구이지 동료였으며 구원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해 이루어지며,경건한 생활이 없이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권고한 사람이었다.
프라하에서의 그의 전파는 그를 강력히 반대하고 그와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비난하던 대주교에게는 너무 지나친 것이었다. 교황은 그를 파문하고 프라하시를 교회의 금지제재 아래 두었다. 그는 프라하를 떠나 남부 보헤미아로 물러나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1414년에 콘스탄스 총회가 열렸고 얀 후스는 재판에 나오도록 소환되었다. 독일의 지기스문트 황제는 오가는 길의 안전 보장을 약속했다. 한 달 후 그가 교황의 추종자들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황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유죄판결을 받고, 그 자신과 그의 저서들이 공개적으로 불태워지는 형을 선고 받았다. 처형되기 2주 전에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으로 대단히 위로를 받았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여러분을 미워하면 여러분에게 복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나의 영을 강화시켰다. 주여 나에게 담대한 마음, 의로운 믿음, 견고한 소망, 온전한 사랑을 주셔서 내가 당신을 위하여 인내와 기쁨으로 나의 목숨을 내려놓게 하소서. 그는 4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얀후스의 순교는 보헤미아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펴 내전을 발생시켰다. 그리하여 소위 후스파라 불리는 사람들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이에 대항해 견고하게 서 있었던 후스파의 소수파들은 후에 보헤미안 형제회, 혹은 모라비아 형제회로 알려졌다.
5.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년)

이탈리아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그는 이탈리아의 페라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도미니크회의 수도사가 되었고 플로렌스에서 사람들의 타락한 삶과 부도덕적인 행위를 향하여 설교했다. 그는 르네상스의 이단적이고 부도덕한 모습들에 반발하였다. 유력한 메디치 가(Medici family)는 그의 가르침들에 대해 조금의 공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얼마간 기독교 공화국인 플로렌스를 통치하였다. 그는 플로렌스 시의 중앙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불태워짐으로 46세의 나이에 죽음을 당했다.
출처 — 성경진리사역원(BTMK) (2017.03.08)